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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설(雜說)/잡설(雜說)

[雜說] ‘국가’라는 이름의 바이러스

by Like the Wind... 2015. 7. 25.

곽병찬 대기자의 오늘자 현장칼럼 '창' 이다.
항상 그의 글은 이 시대, 이 나라의 구조적 병리에
통렬한 일침을 가한다.

퍼 온다.
양해하리라 믿고.

 

‘국가’라는 이름의 바이러스

안경환 선생이 쓴 평전 <황용주>엔 ‘주필의 시대’가 나온다.

“두 라이벌 신문이 쏟아낸 논설과 시평은 전란으로 피폐한 삶 속에서도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갈망하던 지식인 독자들에게 일상의 흥분과 희열을 선사했다.”

주도한 것은 <부산일보>의 황용주, <국제신문>의 이병주 주필 겸 편집국장이었다.
두 사람은 1958~1961년 사이 천의무봉의 문장과 선명한 정치적 관점, 정연한 논리로
정권의 말기적 행태를 분석하고 비판했다.
이는 부산•경남을 넘어서 전국적인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주필의 시대는 5•16 쿠데타와 함께 된서리를 맞는다.
이병주가 쓴 1961년 ‘신년사설’과 1960년 12월호 <세대>지 기고문이 문제가 되어
반공법 위반으로 10년 형을 선고 받는다.
신년사설은 적대적인 대북 정책을 청산하고 통일과 복지국가의 비전을 세우기 위한
국민투표를 이승만 정권에 제안하는 내용이었다.

‘내게는 조국이 없다. 산하만 있을 뿐이다’라는 경구를 남긴
<세대>지 기고문 ‘조국의 부재(不在)’도 내용은 비슷했다.
국민에게 퇴출당한 이승만 정권도 눈감았던 내용을 쿠데타 세력은 용인하지 못했다.
그와 함께 주필의 시대는 스러졌다. ‘
혁명의 동지’ 혹은 ‘쿠데타 세력의 이데올로그’로 찍힌 황용주에게
눈을 돌릴 독자는 없었다.
그러나 그 역시 투옥된다.
1964년 7월부터 11월까지 월간 <세대>지에 기고한 글이 문제였다.
그의 논지는 민족적 민주주의에 입각한 중립화 통일론이었다.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기보다는 한반도의 주민으로 남고 싶다.’

쿠데타에 대한 두 사람의 시각은 예리하게 충돌했지만,
당대의 국가적 과제에는 일치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불경스럽게도 국가에 대해 묻고 또 물었다.
그로 말미암아 둘은 사이비 ‘국가’에 의해 처단됐다.

지난 화요일 국무회의에 참석한 국무위원들 가슴엔 태극기 배지가 달려 있었다.
배지 단 이들의 면면을 보니 한 사람 건너 꼴로 군 미필 혹은 병역 회피,
탈세 혐의자들이었다.
꼭대기부터 아래까지 그랬으니,
조선이 망하자 일장기를,
해방이 되자 태극기를,
인공 치하에선 인공기를,
국군이 들어서자 태극기를 흔들던 이들이 겹쳐 보였다.

태극기는 그들의 가슴에서 조롱당하고 있었다.
 
행정자치부 주도로 순국선열 및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정신 곧
애국심을 계승하기 위한 것이라지만, 자초지종을 돌아보면 더욱 한심하다.
그건 북한 체제를 연상시키는 대통령의 현지지도(영화 <국제시장>에 대한 촌평)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후 행정자치부는 전 국민 나라 사랑 태극기 달기 운동이란 것을 내놨고,
그 일환으로 태극기 사랑 70일 운동과 배지 달기 운동을 펼쳤다.
교육부는 태극기 그리기 및 글짓기 행사를 실시하도록 했고,
문화체육관광부는 각급 호텔에 24시간 태극기를 게양하도록 요청했다.
이런 풍조 속에서 공영통신사인 연합뉴스 사장은 직원들을 모아놓고
국기 게양식을 하기도 했다.
아무리 모범이 없는 세상이라지만 어떻게 북한을 닮으려 할까.

자유주의적인 정부라 해도 애국심 캠페인은 약방의 감초다.
정권을 국가와 동일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데 그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정권은 국가를 앞세워 자신의 실정에 대한 비판을 원천봉쇄 하려 한다.
국가는 정권의 억압장치로 기능하는 것이다.
오랜 세월 국가를 앞세운 억압 구조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도대체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끊이지 않았고,
이병주의 경구는 그 결정판이었다.
태극기가 유신 이래 이처럼 휘날리는 날도 없지만,
마찬가지로 이 불순한 물음도 그때만큼이나 나돌고 있다.

다시 도진 국정원 사찰 의혹은 거기에 불을 지폈다.
이 정권은 미증유의 사건을 또 다른 사건으로 덮어왔다.
그때마다 써먹은 것이 ‘국가’였다.
국정원의 대선공작 문제가 불거졌을 때도 그랬고,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따질 때도 그랬다.
재정 적자와 가계 빚으로 나라살림과 국민이 거덜나면 날수록
그런 호령은 더욱 커졌다.
‘국정원 일동’이 막무가내로 성명을 낸 것은 그 연장이다.
‘국가안보의 가치를 더 이상 욕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며,
결과에 대해 책임 또한 따라야 할 것’이다!
들러리들이 뒤따랐다.
“국정원은 우리 대한민국 안위를 위한 특수한 조직”(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이고,
“국가의 안위를 위한 국가 최고의 정보기관 의혹을 무책임한 정쟁으로
몰고 갈 것이 아니라….”(원유철 원내대표)

‘국가’는 이제 정권이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면피할 수 있고,
오히려 피해자를 공격할 수 있는 장치가 되었다.
해킹프로그램 아르시에스의 스파이웨어보다 더 강력하다.
감염자의 정보를 절도하고, 네편 내편을 섬세하게 가르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자기검열을 통해 감염자가 스스로 합리적인 판단과 정당한 행동을
포기하게 만든다.
그러니 다시 묻게 되는 것이다.
도대체 국가란 무엇인가.
조국이란 있는 걸까.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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